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집트 문명 (문단 편집)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페르시아]]를 털어내는 김에 이집트를 장악하게 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의 문화를 존중했고, 역으로 자신이 받은 [[신탁]][* 자신이 [[태양신]]인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이용해 "아몬의 아들의 명령을 따를 사람은 따르라"라고 하며 이집트를 상대로 배려를 해주었고 이에 이집트인들도 알렉산드로스를 파라오로 인정하고 따랐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입장에선 이집트는 어디까지나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그냥 지나가는 거점이라 오래 있지 못했고,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은 알렉산드로스의 주요 측근들이 내세운 대의명분인 [[필리포스]]의 아들과 충돌하여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인들이 불만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된 [[프톨레마이오스]]가 [[기원전 305년]], 이집트인들이 말을 너무나도 듣지 않자 스스로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칭하며 [[파라오]]에 즉위, "내가 파라오니까 내 말을 좀 들어라"라고 공표하자 이집트인들이 이를 수용해,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성립된다.[* 알렉산드로스의 말을 안 들은 것은, 그가 파라오를 칭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설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우 파라오가 된 남자들의 이름을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칭했으며 X세 대신 칭호를 붙였다. 이것은 그리스 문화 계열 왕조들의 특징이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그리스 계통의 이집트 왕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 시대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세계의 학문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히파티아]]도 여기서 살았으며 여기에 있던 무제이온[* 당시 최대의 도서관이 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이곳의 부속 건물이었다. 참고로 그 도서관은 나중에 파괴되었는데, 범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설도 있고, [[무슬림]]들이라는 설도 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 때문이라는 설,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 때문이라는 설 등등 온갖 떡밥이 난무한다. 특히 부분적 파괴가 아니라 완전한 파괴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은 당시 최고의 연구, 교육기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